박경귀 아산시장, 나는 사실 그를 잘 모른다. 그가 행정학을 전공했고 여러 연구기관에서 일했으며 자칭 그리스 전문가라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다. 상당한 달변가이고 문제에 직면했을 때 기민하며 소신을 굽히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 정도가 인상으로 남아 있다.
무명에 가까웠던 그가 2022년 아산시장에 당선되자 사람들은 그의 돌파력에 놀랐다. 당시 경선 상대였던 유력후보를 누르고 본선까지 승리하는 모습은 작은 드라마였다.
내가 놀랐던 것은 그가 시장에 당선되고 아산시정의 책임자가 되자마자 그가 가진 장점들이 모두 단점으로 돌변했다는 점이다.
그의 돌파력은 비판하는 상대에 맞서는 안하무인의 고집으로 변했고, 그의 소신은 독단적 행정으로 모습을 바꿨다. 그의 화려한 언변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궤변을 포장하는 데 쓰였다.
나는 가끔 그가 환상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고대 그리스의 화려한 문화가 넘실대고 모든 예술이 살아 숨 쉬는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그의 꿈을 깡그리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꽤나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공정하다고 착각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은 미국의 지난 40년을 평가하며 사회적 결속력과 존중의 힘이 상당히 약해졌다고 진단한다. 대한민국과 아산시에 적용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선지자 놀음’은 실패했다. 제왕이 백성에게 시혜를 베풀 듯 문화예술 공연, 전시를 뿌려댔지만 그는 그 백성이 스스로 예술적 활동을 할 때 느끼는 충족감을 성찰하지 못했다.
모든 성공하는 축제가 왜 시민 주도형인지 그는 돌아보지 못했다. 어떤 이는 그가 기획사 대표 같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유토피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꽤나 답답해한다. 하지만 그도 왜 사람들이 히틀러와 비교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히틀러처럼 이상주의에 매몰됐지만 히틀러처럼 사람들을 선동하는 데도 실패했다. 그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정에 섰을 때도 검사와 재판장에게 선거를 잘 모른다며 훈계조로 말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지난 2년 동안 아산시라는 거대한 기계를 혼자 돌릴 수 있다고 믿었다. 수많은 특보를 기용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아산시’를 만들고자 했던 그의 독선 때문에 지난 2년은 참으로 길었다.
지금 시장직 상실 위기에서도 그는 기자들을 불러 남은 임기 동안 아산항을 건설하고 지방정원을 조성하고 문화예술이 넘치는 도시를 만들어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참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그의 기자회견을 지켜보면서 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이리도 힘든 것인가 자문했다.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핵심은 ‘시민의 참여’다. 아테네 시민들은 에클레시아(민회)에 모여 주요 법률과 정책을 결정했다. 민회는 모든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있었고 이곳에서 토론을 통해 의사를 결정했다.
핵심은 시민의 직접 참여와 정치적 평등의 실현이라는 말이다. 현대 민주주의가 왜 이러한 직접민주주의의 장점을 수용하려고 하는지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많은 정치인들도 쓰고 있는 말이지만 나는 샌델 교수의 ‘동료 시민’이라는 용어를 좋아한다. 서로 다른 영역의 온 시민들이 공공선을 추구하는 사회가 대한민국과 우리 아산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지난 2년은 답답했고 좌절감에 빠지게 했지만 깊이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민주주의는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깨어 있는 시민’들에 의해 한 발, 한 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었다.
지난 2년, 그의 공과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다. 그는 대법원에 또다시 상고할 것이고 수많은 비난을 감내하며 꿋꿋하게 12번째 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것이다. 다만, 그의 사법 리스크로 인한 피해를 우리 시민들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는 4년 전 이 도시에 왔을 때처럼 훌쩍 떠나면 그만이겠지만 우리는 이 무너져내린 도시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처럼 지금 필요한 건 하나다. “여기서 네 할 일을 하라!” <저작권자 ⓒ 온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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